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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과

공지 <한양대 70년사>에서의 영어교육과
2020-09-03 10:36:37 조회수4573

<한양대 70년사>에서의 영어교육과

 

1) 학과의 창설과 정초기 (1983-1988)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는 당시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재직 중이던 배양서 교수와 황명숙 교수가 사범대학으로 옮겨오면서 19833월에 학생정원 30명으로 창설되었다. 당시에 영어교육과가 있는 대학이 많지 않던 차에, 서울의 E-대학 영어교육과를 연구하여 교육과정을 마련하였다. 배양서 교수는 영어교육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한 우리나라 거의 최초의 학자였는데, 영어학과 영어교육/응용영어학 과목을 강의하였고, 황명숙 교수는 영문학 중에서 현대 희곡을 전공하였으므로, <학교연극>, <영미수필강독>, <영문학사> 등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그 해 9, 학부와 석사과정에서는 영어학을 전공하고 독서교육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병원 교수가 부임하여, 영어학 전공을 주로 담당하였으며, 시청각교육원장, 영자신문 주간으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초창기에 영어교육, 영문학, 영어학 전공자가 학과 교수로 봉직하게 되었으므로, 지금도 자랑하는 본 학과의 "균형 잡힌" 교육과정의 기초가 일찍 마련될 수 있었으리라.

19863월 응용언어학 중에서 심리언어학을 전공한 이영자 교수가 부임하였다. 이 교수는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응용언어학과 언어학 분야에서 석사 학위를 하기도 하였고 영어가 매우 능숙하였기 때문에, 영어학 전공 과목이나 의사소통연습과 관련된 거의 모든 과목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칫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흐를 수 있는 학과적 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명숙 교수와 함께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화목한 학과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19872월에는 개인적 사정으로 김병원 교수가 퇴임하였고 (현재는 한국언어사고개발원 원장으로 재직), 그 해 2월과 8월에는 제1회 졸업생 33명이,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제2회 졸업생 32, 그리고 1989년에는 제3회 졸업생 26명이 배출되었다.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과 학과 내외의 여러 문제로 인하여 소요가 잦았고 그로 인하여 학과의 상황도 불안정해 보이기는 했지만, 3회까지 이미 90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학과는 이 시기에 교과과정 수립과 운영 등의 면에서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2) 성장기 (1989-2009)

 

학과가 본격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안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안정을 이루고 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할 김임득 교수 (박사, 2언어습득 전공)19893월에 부임하였다. 영동중학교와 창덕여자고등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사로 봉직하고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바도 있었던 김 교수는 풍부한 현장 및 전문 지식, 특유의 포용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하여 학과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한국 영어교육 사상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는 제6차 국가교육과정의 개정 작업을 주도하였다. 문법-번역식 혹은 행동주의-구조주의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Audio-Lingual Method에 의한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암기 중심의 영어교수학습을 실생활을 중심으로 한 의사소통적 영어교육 방식으로 변혁해 버린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영어교육을 정확성 중심에서 유창성 중심으로 그 중심축을 이동시킨 것이었고, 국제화되는 현 상황을 예견하며 협상과 타협 등 구술 의사소통[] 중요시하는 예지에 빛난 것이었다.

그와 함께, 김교수는 현재 대학입시의 중심틀이 되고 있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구상하고 개발하는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체적인 시험의 윤곽을 잡는데 그치지 않고, 김교수는 구체적으로 문제 유형 개발에서부터 파일럿 시험 실시, 그 후 전국적인 국가시험으로 정착할 때까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리더쉽과 봉사정신으로 한국의 영어교육의 획기적인 발전의 틀을 이룩하게 되었다.

6차 교육과정부터, 우리나라의 영어교육이 일본의 영어교육을 선도해 나가기 시작한 것은 영어교육 전문가들[]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 전까지는, 일본의 전철을 밟으며 그 교과서의 좋은 내용들을 골라서 영어교과서를 만드는 경향도 없지 않았지만, 그 때부터 좀 더 창의적인 교과서들이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김교수는 교육과정의 수립, 대학수학능력시험 정착 뿐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영어교육의 밑받침이 되는 교과서 제작에도 계속 참여하여 교과서의 선진화에 큰 공을 남기었으며, 영어교육과 영어학 관련 학술단체의 주요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활발한 연구활동을 전개하여 다수의 결과물을 국내외 학술잡지에 발표하면서 영어교육 연구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사이, 졸업생들은 1990년 제437, 1991년 제544, 1992년 제629, 1993년 제719, 1994명 제832, 1995년 제924명을 배출하였는데, 19952월에 배양서 교수가 퇴임을 하고, 동년 3월에는 영어학 (통사론)을 전공한 안성호 교수가 부임함으로써, 영어교육과 사상 최초로 교수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안성호 교수는 영어학 전공자 부재의 공백을 메우며 <영어학서설>, <영어통사론>, <영어학특강> 등을 가르쳤다.

1996년에는 제10회 졸업생 34명을 배출하였고, 1997년 제1129명을 배출하였으며, 19972월에 황명숙 교수가 퇴임을 하고 동년 3월에 영어교육 (2언어습득, 영어평가)을 전공한 한문섭 교수가 부임하였다. 이를 통하여, 영문학을 전공한 교수가 없어졌기 때문에, 영어교육과는 교육과정 운영에 있어서 인문대학 영문과와 더욱 긴밀하게 협조하게 되었다.

한문섭 교수는 <영어평가> 등을 가르치며, 교내에서는 TESOL 과정의 설치를 포함한 국제어학원의 기초를 놓는 일에 많은 기여를 하였고, "윤선생영어 장학금"을 유치해 오는 등 대외적으로 영어교육과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많이 기여하였다.

그 후, 1998년에는 제1223, 1999년 제1332명을 배출하였다. 그와 함께, 1999년에는 학과의 숙원사업 중 하나였던 영어교육 석/박사 과정을 처음에는 영어영문학과 내에 다음에는 사범대학에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영어영문학과와 협조하여, 교육대학원 (초등)영어교육 전공, 실용영어 과정 운영 등에서 한양대학교의 발전에 더욱 기여하게 되었다.

2000년에는 제1438, 2001년 제1521, 2002년 제163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20023월에는 멀티미디어 영어교육을 전공한 김성연 교수가 부임하였다. 김성연 교수는 새롭게 일어나는 멀티미디어 영어교육 관련 과목 뿐 아니라 탄탄한 양적 연구방법론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대학원 과정에서 엄밀한 연구방법 사용을 북돋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003년에는 제1718, 2004년 제1833, 2005년 제 1923, 2006년 제2029, 2007년 제2135, 2008년 제2227, 그리고 2009년 제2337명을 배출하였다.

20098월에는 그동안 20여년동안 학과, 학교, 영어교육계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김임득 교수가 퇴임하였고, 그 공을 기리기 위하여, 제자들의 중심이 되어 <한양교육논총>2009년 봄호를 영어교육 특집호로 꾸며 김 교수에게 헌정하였다. 그리고, 이제 교육대학원에 주력할 전유아 교수의 임용을 기다리고 있다. 전 교수는 쓰기 및 어휘 교육 등의 전문가이다.

그동안, 이영자 교수는 문자언어교육, 특정언어장애, 문화교육 등의 분야에서 학문적 기여를 해 왔고, 안성호 교수는 영어통사론의 이론적 연구 뿐 아니라, 언어학적 시각에서 제2언어/3언어 습득, 다문화교육으로 그 관심을 넓혀서 2007년부터 시작된 예비교사를 위한 다문화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해 왔으며, 한문섭 교수는 영어몰입교육, 영어평가 등에서 학문적 기여를 해왔고, 그동안 경기영어마을 설치, 공대 영어과정 설치 및 운영에 기여하였고 현재는 실용영어 과정의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김성연 교수는 멀티미디어 영어교육 뿐 아니라 초등영어교육, 어휘 교육, 영어사용능력 교육, 특히 영어쓰기 교육 등으로 그 연구 관심 영역을 넓히며 활발한 연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학과의 역사를 정리한다고 하자, 명예교수로 있는 황명숙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 감회를 술회한다.

 

"20101231創立 70주년을 맞는 漢陽大學이라는 巨木 앞에 숙연해진다. 그 그늘에서 젊은 날의 한때를 살찌워왔던 所重存在이기 때문이다. 나이테가 그의 삼분일 에도 못미치는 어린가지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所重한 것, 그것은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 학과이다.

"20년 전 창설 당시 겨우 30余名 新入生과 두 명 교수 합해서 소그룹의 學科였다. 말할 수 없이 어설픈 조건의 텃밭에 던져진 조그만 씨앗 하나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 씨앗 가꾸기에 專念하던 그때가 마냥 그립다. 우리는 한 마음으로 학생, 교수 모두가 따스하게 뭉쳐 일했다. 일 년이 지나 다음 해에 두 배로 그 가 늘었고, 다음 또 다음해를 거듭하며 倍加해 갔다. 그러는 동안 一回 졸업생을 배출했을 때 그 때의 감회 무어라 할까?

"배양서 교수와 나(황명숙)만의 (한 학기가 지난 후 김병원 교수가 부임했고) 삼년이 지난 후 李映子 교수, 金任得 교수가 合勢하여 주었고, 이어 안성호, 한문섭, 김성연 교수 등 후임 교수들의 協力이 이어져, 우리 英語교육학과의 텃밭은 비옥해 갔고, 싹이 움트고, 봉우리 터의 새잎들이 돋고, 점차 굵은 가지로 자라주었다.

"이제는 둥근 太陽아래 그 빛 곱게 자랑하는 新綠季節을 맞고 있다. 너무나도 멋지고 자랑스런 한양대 사대 영교과이다. 이 따스하고 포근한, 언제나 너, 나 하나로 잇는 우리 英語科란 배움터에서는 틀림없이 豊盛人生의 알찬 結實들을 期待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한양대학교 70년사>>를 위한 원고

[정리: 안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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